예술 형이상학-예술 존재론-예술 인지주의


 

언어 자체에 대한 반성은 예수 아닌 범부가 물 위를 걸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물 위를 걸어나아갔다, 라고 소설 속에서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어떤 맥락에서는) 무의미하지 않고 또한 거짓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진술이 문제적이라고 혹은 심지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물 위를 걷는 사람’이라는 소설 속의 묘사는 거울을 처음 보는 아이에게 거울의 존재가 의미하는 바와 똑같은 문제를 세계 속에 던져준다. 이러한 터무니없음을 사람들은 허구라는 단어로 개념화했다. 허구, 그것은 있음인가? 허구는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에 올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범부의 발은 곧 물속에 빠진다. 그러나 범부 아닌 사람은 없다. 범부의 언어들 가운데 ‘허구의 영역’이라는 말이 있다. 언어에 대한 사유는 바로 이러한 말들의 무한성으로 인해 미궁에 빠진다. 언어는 ‘허구’를 품고 있으며 동시에 허구의 영역 속에 있다. 이 언어를 달리 예술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흔치 않으며,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허구’를 살지 아니하며, 따라서 그들이 사랑하는 예술과 그들이 소유한 언어의 정체는 모호해진다. 예술은 어디에 있는가? 언어는 무엇인가? 허구의 영역이라는 말과 함께 ‘물 위를 걸어서’ 우리는 우리 물음의 답을 숨겨 놓고 있을 미로에 다다른다. 예술과 언어를 감춰놓은 미로, 허구의 미로. 이 미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또한 창조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자가 훨씬 중요하다. 미로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로는 움직이고 변화하며 사라지기도 한다. 이는 거대한 사건이며, 그러나 잘 감지되지 않는다. 미로의 변화·생성·소멸은 철학의 지반 위에서 이루어지며, 철학의 지각변동이 미로의 모습을 바꿔놓는다. 수많은 지각변동 가운데 굵직한 세 차례의 변동, 니체, 하이데거, 굿맨의 미로창조를 파악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이 파악이 성공할 경우 우리는 언어와 예술이 존재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미로의 복잡성은 끊임없이 배가되고 있고, 우리의 걸음은 더딘 까닭이다. 게다가 우리의 행보는 그들의 불친절한 언어의 징검돌을 건너뛰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진리와 은유-니체의 예술형이상학

지겨운 질문 하나.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영원불변하며 보편타당한 어떤 것, 선한 동시에 아름답고 황홀한 기쁨이며, 유일한 하나요 신이다. 인생은 진리로 향하는 길이(어야 하)며, 이 길의 동반자요 안내자는 이성이다. 이성은 인간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고 정직한 친구이며 신이라는 이름의 진리가 선사해준 선물이다. 이것이 이른바 전통철학의 수사학이다. 이때 수사학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그것은 전통철학의 영토로부터 추방된 시민이기 때문이다. 엄숙한 진리의 신국(神國)은 가볍고 쾌활한 말장난의 집시Gipsy들을 위한 신분증을 발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집시의 유랑이 끝날 때가 왔다. 그들이 전통철학국가의 시민으로 받아들여져서가 아니라 국가가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수사학이 그를 해체시킨 것이다. 니체의 수사학이, 그러니까 철학이 된 수사학이 무정부주의를 도래시켰다. 전통철학의 헌법인 진리에 대해 니체의 철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유동적인 한 무리의 비유, 환유, 의인관들이다. 간단히 말해서 시적, 수사학적으로 고양되고 전용되고 장식되어 이를 오랫동안 사용한 민족에게는 확고하고 교의적이고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적 관계들의 총계이다. 진리는 환상들이다. 진리는 마멸되어 감각적 힘을 잃어버린 비유라는 사실을 우리가 망각해버린 그런 환상이며, 그림이 사라질 정도로 표면이 닳아버려 더 이상 동전이기보다는 그저 쇠붙이로만 여겨지는 그런 동전이다. 우리는 진리를 향한 충동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까지 사회가 실존하기 위해 세워놓은 ‘진실되어야 한다’는, 즉 관습적 비유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책무에 관해서만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표현하자면, 확고한 규약에 따라 거짓말해야 한다는 책무이다. 그런데 인간은 물론 사태가 그러하다는 것을 잊는다. 그러므로 그는 언급한 방식대로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수백년 동안의 습관에 따라 거짓말을 한다. 인간은 바로 이 무의식성을 통해, 즉 망각을 통해 진리의 감정에 이르는 것이다. 어떤 사물을 붉다고, 다른 사물을 차갑다고, 그리고 또다른 사물을 벙어리라고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감정에서 진리와 연관되는 도덕적 충동이 일어난다.>

 

‘구속력있는 문체로 집단적으로 거짓말하라는 의무’의 충실한 이행자는 누구인가?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이다. 진리로서의 지혜, 소피아Sophia를 사랑하는 자들, 필로소피아Philosophia. 언어는 그것이 진리를 말하는 것인 한에서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리가 환상이며 확고한 인습에 따른 거짓말이라는 것이 밝혀진 다음에 언어는 무엇일 수 있는가? 언어는 은유다. 그리고 진리도 은유다. 언어는 세계와 일치하지도 동형적이지도 않으며, 세계와 그 속의 사물들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진리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자의적이며, 따라서 그 자체 은유적이다. “언어는 모든 사실을 적합하게 표현해내는가? ······ 말이란 무엇인가? ······ 특정한 신경자극이 먼저 어떤 상으로 전달된다! 첫 번째 메타포. 그 상을 다시 어떤 소리가 본뜬다! 두 번째 메타포. 그리고 매번 각 영역 사이에서 완전히 비약이 일어나며, 그 비약은 완전히 다르고도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의 비약이다.” 여러 단계의 전이과정을 거쳐 개념이 생성되는데, 이 과정 중에 이미 사태 그 자체는 ‘분리’되어 사라져버린다. ‘번개-침’으로 존재하는 사태를 우리는 “번개가 친다”라는 말로, 즉 ‘번개’라는 주어와 ‘친다’라는 술어로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전이의 과정에는 그 어떤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이 유일한 원리이다. 진리는 한 무리의 은유이며, 은유는 허구다. 허구 속에 진리가 있다! 거짓이 진리를 잉태하는 모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진리를 향해 인생길을 걸어가던 수많은 영혼들은 어떻게 되는가? 길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아니 애초부터 길이라는 것이 있기나 했던가? 니체는 절대적 파괴자이기만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유일무이하고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의 공허한 눈을 우리가 가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제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무엇인가? 은유의 유희이다. 니체는 말한다. “나의 철학은 전도된 플라톤주의이다. 진실한 존재로부터 멀어질수록 더욱 순수하고 아름답고 훌륭하다. 가상 속에서의 삶이 목표이다.” 은유의 유희, 가상 속에서의 삶은 곧 예술이다. 이념의 감각적 현현으로서 철학에 복무하는 예술(헤겔)이 이념도 철학도 모두 거부한 채 가상의 유희가 되는 것, 이것이 삶이다. 이때 삶은 곧 꿈이다. 꿈은 가상의 가상이며, 훌륭하고 찬양할 만한 가상이다. “나에게 ‘가상’은 지금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이지 어떤 본질의 대립이 아니다. 본질의 가상이라는 술어 이외에 도대체 내가 본질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가상이란 미지의 X에게 씌우고 벗겨낼 수 있는 죽은 가면이 아니다! 나에게 가상은 실제로 힘있는 것이며 살아 있는 것 자체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조롱 속에서도 나로 하여금 여기에는 가상, 도깨비불, 유령들의 춤 이외에 다른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느끼도록 해준다.”

 

신을 사랑하고 진리를 믿고자 했던 예전의 인류는 ‘오류로서의 문법’이 선사해준 이성의 안경을 끼고 살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동일화’시키며 이해했다. 아니, 이해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동일성은 그들 자신이 집어넣은 것이며, 그들의 이해는 따라서 처음부터 그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의 확인에 불과하다. “인간은 영원한 진리aeternae veritates로서 개념과 사물의 이름을 오랜 시간 동안 믿어왔다는 점에서 자신이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자부심을 취했던 것이다. 그는 정말 언어 속에서 세계를 인식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간은 그러나 오류-문법의 안경을 벗을 수 없다. 그것은 이제 각막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은 언어의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이 감옥을 벗어나려 애쓰는,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삶은 처절하고 불행하다. 감옥을 정원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인간의 언어, 인간의 은유다. 그것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은유적 언어가 없다면, 즉 끊임없는 변형과 생성이 없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는 동물인 것이다.” 또한 “은유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충동은 인간의 근본적인 충동이다. 이러한 충동을 우리는 한 순간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인간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사적 인간homo rhetoricus의 은유, 가상의 유희는 세계를 “스스로를 잉태하는 예술작품”으로 만든다. 삶이 곧 예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일까? 인간의 은유는 어떻게 소통되며, 가상들은 서로 어떻게 만나는가? 소통과 만남을 위해서 다시 진리를 요청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러한 보편 의미에 대한 요구는 예술가 니체에 의해 기각당한다. “진리를 벗겨내는 일에서 예술가는 베일을 벗기고도 황홀한 시선으로 항상 베일로 남아있는 것에 고정되지만, 이론적인 인간은 벗겨진 베일에 만족하며 언제나 자신의 힘으로 성공적으로 벗겨지는 행복한 과정에 지고한 쾌락의 목표를 둔다.” 그러나 아주 색다른 방식으로 베일을 벗기려는 시도를 한 사람이 있었다.

 

시와 언어-하이데거의 언어-예술 존재론

 

니체가 파괴한 언어의 집을 다시 짓는 이는 하이데거다. 그러나 이 집은 진리의 거처가 아니라 존재의 거처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실용성과 진보의 기치 아래 가속확산되고 있는 논리와 실증의 언어는 그 속에 존재를 위한 방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 이 언어는 그 모습을 달리한 대로 나름의 진리를 추구하는 언어인데, 이때의 진리는 무엇보다도 ‘정확성’이라는 옷을 입고 있다. 19세기의 니체는 바로 이러한 언어의 공기 속에서 숨을 쉬며 살았지만, 정작 그가 파괴한 것은 잊혀져 가는 옛 과거의 유물, 폐허가 되어버린 진리의 성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제 새로운 진리가 인간의 길 끝에 부활했으며, 인간은 정확한 방법을 가지고 그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이 방법을 사람들은 과학이라 부른다. 과학의 언어는 옳고 그름 혹은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언어이다. 시간의 흐름의 부침을 겪지 않으며 어디서나 통용되는 언어. 보편타당한 진리로서의 언어(물론 여기에는 예전과 같은 ‘영원성’의 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 언어의 힘은 그것의 실증성 또는 실제적 유용성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사태가) 그러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며, 이 느낌은 점점 굳어져 인간의 본성처럼 되어버렸다.

 

인간의 삶으로부터 시간성과 역사성을 탈취하여 ‘바깥’에서 관찰하는 과학이 인간의 삶에 가져다 준 풍요는 어찌 보면 역설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 일을 과학은 해내었으며 지금도 해내고 있다. 물론 이는 과학이 수학 및 기술과 결합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으며, 이 삼자의 결합은 오랜 역사를 가진다. 이 역사를 하이데거는 억압의 역사 혹은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본다. 이 역사가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는 세계는 ‘과거의 신들은 이미 없고 다가올 신들은 아직 없는 이중의 가난’ 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세계 속에 있고, 결코 세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세계는 단순히 공간과 등치될 수 없고, 된다 하더라도 그 바깥은 없다. 인간은 ‘세계-내-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언어-내-존재이다. “그(하이데거-필자)가 말하는 언어는 그 외연을 최대한으로 넓게 잡은 언어, 즉 몸짓이나 침묵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하늘의 천둥, 번개도 신들의 눈짓으로서 시인들에 의해 해석되어야 할 언어”이며, 이러한 언어는 “과연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접근은 시에서 출발한다. 과학과 기술의 언어, 일상의 언어와는 달리 그가 말하는 ‘본래적인 언어’는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면 어떤 것을 언어 속에서 다룰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어 자신은 언어 속으로 들어오길 힘들어 한다. 언어 자신이 언급되는 것은 언제인가? 기이하게도 그것은 우리와 간여되어 우리를 이끌고 괴롭히고 또는 즐겁게 하는 어떤 것에 대해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할 때, 즉 어떤 사태나 경험을 적절하게 표현할 언어가 다가오지 않고 머뭇거리는 때다.” 이러한 머뭇거림은 피상적인 일상 언어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익숙해짐의 대가인 인간은 자라면서 언어의 관습적 사용에 놀라우리만치 능숙해진다. 일상 언어의 사용은 숨쉬기와 같다. ‘세인’들은 머뭇거리지 않는다. 숨쉬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는 이른바 비상사태(사고나 경악, 충격의 상태) 뿐이다. 그런데 시인은 언어-호흡에 있어서 이러한 비상사태를 가장 자주 그리고 심각하게 겪는다. 시인과는 달리 “언어가 주는 착각에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야릇한 것을 상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은 그 안에 말 자체를 숨겨버리는 순간이 있다. ······ 이 세상의 언어 속에서 언어의 존재로서의 언어, 존재의 언어로서의 언어는 침묵한다.”

언어는 이렇게 쉽게,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호흡’되지만, 동시에 항상 숨어있다. 이 숨어있는 언어, 은폐된 언어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시를 읽고 해석한다.

 

말 - 슈테판 게오르게

 

먼데서 오는 경이(驚異)나 꿈을

나는 내 나라의 경계에까지 가져왔다.

 

그리고 백발의 운명의 여신이 그녀의 샘 속에서

이름을 찾아낼 때까지 나는 기다렸다-

 

그러면 나는 그 이름을 실팍하고 힘있게 붙잡을 수 있었다

이제 이름은 꽃동산을 이루고 변경에 걸쳐 빛나고 있었다......

 

언젠가 나는 즐거운 여행 끝에 도착했다

화려하고 부드러운 보석을 하나 가지고

 

여신은 오래오래 뒤지더니 나에게 일러주었다:

>여기 깊은 밑바닥에는 아무것도 잠들어 있지 않네<

 

그러자 보석은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내 나라에서는 그 보물을 두 번 다시 얻지 못하였다......

 

이렇듯 서글프게 나는 체념을 익혔다:

말이 부서진 곳에는 어떤 사물도 없을지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시는 시인의 배움의 과정 또는 눈뜸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 혹은 자신이 발견한 사태에 적절하게 붙여줄 수 있는 이름을 찾는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때 언어는 사물과 자신을 이어주는 통로이거나 본래적인 사물에 붙여지는 레떼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깊은 밑바닥에는 아무것도 잠들어 있지 않다’는 여신의 말을 들은 후 시인의 손에서 보석이 빠져나간다. 이것은 영원한 상실이다. 그리하여 그는 깨닫게 된다. ‘말이 부서진 곳에는 어떤 사물도 없다.’

 

그러면 이제 시인은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는 불구의 처지가 되어버린 걸까? 여기서 역설이 발생한다. 이러한 체념은 그로 하여금 침묵 혹은 청종을 통하여 말할 수 있게 한다. 언어 자신이 말하게 하기 위해 시인은 체념을 청종으로 변화시킨다. “시인은 언어의 요구, 즉 말건넴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언어의 말건넴을 기다리며 듣는 시간은 정적의 순간이다. 이 정적의 샘으로부터 길어올려진 말들이 시가 된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정적으로부터 발해지는 존재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구체화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예술이란 사물들을 세계 안에 존재하게 함으로써 그 자체의 고유한 본질에 있어서 현성하게 하는 한편, 세계를 사물 안에 집수되게 함으로써 세계를 그 자체로서 현성하게 해준다.”

 

하이데거적 언어의 세계 속에서 소통은 교환관계가 아니다. 교환에 앞서 전제되는 실체 혹은 주체의 개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소통은 ‘같은 기분 속에 있음’이다. “구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항상 어떤 기분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존재다. 인간은 어떤 기분을 다른 기분으로 전환하는 것을 통해서 떠날 수 있을지는 모르되, 결코 기분 자체로부터 떠날 수 없다. 기분이란 단순히 인간의 내면적인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에 처해 있는 상태다. 기분마다 세계는 전적으로 달리 나타난다.” 이러한 기분 가운데 근본기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존재의 말과 인간의 말이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할 때” 나타난다. 이는 인간이 존재의 언어에 귀기울이고 그 말건넴에 온전히 참여함으로써 가능한 현상이다.

 

비록 하이데거가 언어예술을 으뜸으로 꼽고 있기는 하지만, 예술 일반은 존재 망각의 역사에 저항하는 최고의 무기이며, 참된 삶을 열어주는 빛의 길이다. 희랍어의 진리aletheia(ἀλήθεια)는 망각하지 않음, 즉 드러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삶으로부터 시간성과 역사성을 탈각시킨 채 기술적 풍요로움의 환각을 통해 ‘기분’을 일면적으로(퇴락시키면서) 마비시키는 과학문명의 언어는 이러한 망각을 더욱더 심화시키고 있다. 세계가 열리게끔 청종하고 그렇게 열린 자신의 세계 속에서 근본기분에 겸손히 참여함이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대안이다. 존재자를 존재로 믿고, 일상의 퇴락한 언어를 언어 그 자체로 생각하는 것은 본말전도이다. “존재가 망망대해의 파도라면 존재자는 파도가 칠 때 생성되었다 소멸되는 물거품이다. 존재자가 위치를 점유한다면 존재는 좌표계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 이러한 드러남은 하이데거 자신에게만, 혹은 더 너그럽게 보아서 그의 동조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 달리 말해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참된 존재의 역사는 단 하나의 밀폐된 모나드 속의 역사와 같은 것이 아닌가? 존재의 언어는 결국, 다시, 일상의 언어다. 그것은 둘이 아닌 하나다. 그러므로 언제 존재의 언어인가? 예술은 그 숱한 제도적·사회적·관습적 토대와 결별하여 ‘언제’ 존재의 역사를 개시하여 주는가? 모든 시가 다 그러하고, 모든 음악, 미술이 다 존재를 개시하여 주는가? 그러나 우리는 예술과 산업이 착종된 시대, 진짜와 가짜, 예술과 외설이 서로 옷을 바꿔 입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므로, 다시, 언제 예술인가? 이 질문에 대한 완전히 다른 방식의 대답을 굿맨에게서 들을 수 있다.

 

제작되는 세계-굿맨의 예술 인지주의

 

미로를 폐허로 만든 것은 철학사의 위대한 주인들의 공적이다. 그들이 사용한 무기는 이분법Dichotomie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니체는 이 무기의 유치함에 대해 웃음으로 답했고, 그로써 그것을 무력화시켰다. 그런데 니체의 철학을 철학사에 편입시킨 장본인인 하이데거는 니체를 ‘최후의 형이상학자’라 비난하면서 차원이동된 이분법을 재가동시킨다. 존재/존재자. 그런데 그의 철학은 다분히 신학적 종교적 색채를 띠면서-물론 이는 그의 입장에서는 필연적인데-모호성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린다. 요컨대, 이러한 비유를 쓰는 것을 용납한다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된 것이다.

 

“예술은 실재하는 세계를 본뜬 것이 아니다. 빌어먹을 실재는 하나로 충분하다.” 굿맨은 그의 책 『예술의 언어들』의 제 1장 「다시 만들어진 실재」를 이와 같은 격한 제사를 도입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이는 많은 문제를 시사하는데, 우선 문장 속에 사용된 단어들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실재하는 세계, 본뜸, 빌어먹을 실재, 그리고 예술. 플라톤 이래로 진리는 대상과 인식의 일치라는 뿌리깊은 편견이 전승되어 왔던 바, 이러한 구도에 합치되는 것이 예술은 실재의 모방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이때의 실재가 무엇인가에 대해 합의에 도달한 적은 없으며, 사실 철학사는 이 물음을 둘러싼 논쟁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굿맨은 이 물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실재는 ‘빌어먹을 실재’인 것이다. 이 문장의 과격성을 그는 한 차례 더 뛰어넘는다.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선언이다. 자연은 예술과 담론의 산물이다.”

 

이런 맥락에서 굿맨은 자신이 철학사의 거대한 전쟁, 관념론과 실재론의 대립을 ‘해소’했다고 말한다. 실재론이 주장하는 참된 대상으로서의 실재, 인간의 이성, 의지, 믿음 따위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는 굿맨에게서 ‘잃어버려도 좋은’ 것으로 전락한다. 관념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의식, 이성은 그 자리를 상징체계에 넘겨주게 된다. 간단히 말해 의식에 앞서 언어가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니체철학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유사성의 발견을 의미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단지 관점적 평가만이 있다는 점을 잊어버리는 것에 힘입어 한 사람 안에 모순되는 평가들이 우글거리고 따라서 모순되는 충동들이 우글거린다. 이것은 인간이 병들어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본능이 아주 특정한 과제들을 만족시키는 동물과는 완전히 반대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에 찬 피조물은 자신의 본성상 탁월한 인식방식을 갖는다: 그는 다양한 찬성과 반대를 느낀다-그는 공정함으로 자신을 고양시킨다-선악의 평가 저편을 파악하기 위해서.

가장 현명한 인간은 모순을 가장 풍부히 갖는 자일 것이고 동시에 모든 종류의 인간에 대해 촉각 기관을 갖는 자다: 그리고 때때로 장엄한 화음[을 이루는] 위대한 순간을 [경험하는 자다]-고도의 우연이 역시 우리 안에 있다!>

 

<실재론자는 세계가 없다는 결론에 저항할 것이고 관념론자는 모든 상충된 버전들이 다른 세계를 기술한다는 결론에 저항할 것이다. 나로서는 이 견해들이 똑같이 즐겁고, 똑같이 한탄스럽다. 왜냐하면 결국 그들 간의 차이란 것도 순전히 규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근원적인 세계는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부될 필요는 없으나 전부 잃어버려도 괜찮은 세계이다. ... 진정 세계는 잃어버려도 괜찮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세계와 함께 절대주의의 바보같은 전형들: 유일한 이미 포장된, 그러나 불행하게도 발견될 수 없는 실재를 발견하려는 노력으로서의 과학의 부조리한 개념들, 그리고 그 접근 불가능한 실재와의 일치로서의 진리개념들 역시 잃어버려도 괜찮다.>

 

굿맨이 보기에 세계는 항상 (재)제작되는 것이다. 실재론이 주장하는 유일한 실재는 공허하거나 잃어버려도 좋은 세계이다. 우리가 세계를 제작하는 것은 판본version에 의존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무수히 많은 세계들이 공존할 수 있으며, 하나의 참된 세계란 없다. 그는 “...세계가 판본들로 융해되는 것을 보며 판본들이 세계들을 만드는 것을 보며 존재론이 덧없음을 발견한다.” 세계의 기원 혹은 언어의 기원에 대한 물음 역시 덧없기는 마찬가지다. 유일하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추구했던 인간들은 이러한 것들을 궁금해했다. 그러나 세계는 ‘언제나 이미’ 제작되어 있는 세계로부터 재제작되는 것이므로 기원은 없는 것이거나 몰라도 좋은 것이다. 혹은 무수히 많은 기원이 존재한다. “세계를 만드는 원료마저 만들어지며 세계는 다른 세계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니체에게 던져졌던 질문을 굿맨도 피해갈 수 없다. “진리는 우리가 다가설 수 없는 버전 독립적인 실재와의 대응이 아니라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조종되고 만들어지며, 종종 상충되는데 그 상충된 진리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진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러면, 진리가 아니라면,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우연인가? 그것은 옳음이다. 그러나 굿맨은 옳음에 대한 정의(定議)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는 그로서는 자연스런 태도라 하겠다. 무수한 세계들이 있고, 그것은 각기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기까지 하는 판본들에 의해 구성되고 작동되는데, 단 하나의 정의를 가진 옳음이라는 것이 그 세계들에 유효할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옳음의 몇 몇 특성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말해볼 수 있다. “...옳음은 언급의 효과에 관련되는가 하면 어떤 목적을 위한 유용성에 관련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진리가 다만 옳음의 하나의 종이라기보다는 그것은 ”관련성(relevance)", “효과”, “유용성” 등과 더불어 옳음의 하나의 요인이 된다.“ 관련성, 효과, 유용성 등의 단어들은 ‘무엇을 위해’, 즉 목적이라는 동위원소로 통분된다. ”그래서 버전의 옳고 그름은 그 버전이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서는 말해질 수 없다.“ 옳음은 또한 그 반대방향의 계기도 가지는데, 이를 굿맨은 ”관습과의 맞음(fitting)의 문제“라 칭한다. ”여기서 관습은 고정된 실재가 아니며, 관습에 의거한 추론, 표상, 예시는 미래에도 반드시 그러할 것이라는 보장을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관습은 현상태에서 우리가 아직 폐기하지 않은 인식론적, 방법론적 자원들에 대한 최적의 사용을 가능하게 해준다.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온 버전은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랬을 때 우리의 관습은 수정되며 새로운 버전이 받아들여진다.“

 

굿맨의 옳음 개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맞음’과 ‘작동’이다. 맞음은 실재와의 대응이 아니며 구성하는 판본, 담론, 기호체계와의 맞음이고, 이는 수동적이거나 일방적인 것이 아닌 서로 어우러지며 맞추어감이다. 맞음은 작동에 의해 그 효과가 검증되며, 작동은 그 버전의 목표와 구성에 적합할 때 문제 없이 진행된다.

 

이러한 설명과 함께 인식과 진리에 대비해 이해와 옳음을 내세우는 굿맨의 세계가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이 맥락에서 인식을 과학(학문)에, 감정을 예술에 귀속시키는 이분법이 굿맨에 의해 파기되는 것이다, 과학과 예술은 양자 모두 이해의 증진과 확대에 기여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난점들 대부분은 인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 사이의 지배적인 이분법 탓으로 돌릴 수 있음을 나는 암시했다. 한편에다 우리는 감각작용, 지각, 추리, 추측, 냉정한 모든 탐지와 검사, 사실, 그리고 진리를 놓고, 다른 한편에는 쾌, 고통, 관심, 만족감, 실망, 뇌가 개입하지 않는 모든 정감적 반응, 호와 불호를 놓는다. 이런 이분법은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우리는 심미적 경험에서 감정들이 인지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한다. 예술작품은 감각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느낌을 통해서도 감지된다. 정서적 무감각은 여기서 시각 상실이나 청각 상실처럼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결정적으로 우리를 무력화시킨다.>

 

예술이 심미적 경험을 제공해 줌으로써 “과학자를 더 예리하게, 그리고 상인을 더 기민하게 만들고, 거리에서 청소년 범죄자들을 없앤다”는 실용주의적 견해, 예술은 인간의 본래적 성향인 상징화가 발현된 결과로서 “개들이 짖는 것은 그들이 개과에 속하기 때문이며, 인간이 상징화하는 것은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유사생물학적 견해(니체), 그리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의사소통은 사회적 교통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하며, 기호들은 의사소통의 매체”라는 이른바 “잡식성의 의사소통이론”(하버마스)의 세 가지 관점은 모두 예술을 “몰아가는 힘은 호기심이고 목표는 계몽”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인간이 기호를 사용하고 예술을 창조·향유하는 것은 이해하기 위함이다. “우리를 몰고가는 것은 알고자 하는 욕구이며, 즐거움을 주는 것은 발견이다. 그리고 의사소통은 소통되어야 할 것을 파악하고 공식화하는 일에 비해 이차적인 것이다. 우선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의, 그리고 그 자체를 위한 인지이다. 실용성, 쾌, 충동, 그리고 의사소통적 유용성은 모두 이것에 달려 있다.” 예술 지상주의가 퇴장하고, 인지 지상주의가 등장한다.

 

그러나 언제나 이미 제작되어져 있는 세계는 동시에 다른 세계들과 공존하고 있지 않은가? 관습과의 맞음을 중요시하는 굿맨은 어째서 판본간interversional 소통의 문제를 이렇게 소홀히 다루는가? 그는 은연 중에 ‘자율적 영역으로 분화된 예술’이라는 19세기적 관습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는 가상의 유희가 그 자체로 완결적인가, 기원으로서의 예술작품은 어떻게 인정되는가의 문제와 함께, 이들이 일으킨 지각변동이 남겨 놓은 혼돈의 잔여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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