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과 종교, 그리고 기계

현대 사회에서-특히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는 남자와 여자, 혹은 사람과 사람은 우선 전략적으로 서로의 조건을 탐색한다. 결혼을 예를 들자면, 결혼하기 위해서 남자는 무조건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여자는 얼굴과 몸매를 업그레이드 시켜야 한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왜 좋아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끝까지 파고 들어가보면, 대답될 수 없는 성질의 물음이다. 이는 마치 나는 왜 한국인이며, 너는 왜 일본인인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전략적 조건 탐색이라는 인간의 생존 및 관계 방식은 이러한 이유 없음에 대해서,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시도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대응이 전혀 의식적이거나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기계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좋아지는 과정이 설명될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끌리는 그러한 사태를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사랑을 그저 판타지로만 소비할 뿐, 아무도 제 손바닥을 치우고 하늘과 태양에 마주 서려 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하면, 그들은 아마 눈이 멀어버리고 말 게다. 그러나 판타지의 소비마저도 그저 '젊은 날 한때'에 불과하다. 이 한때가 지나가고 결혼이라는 무미건조한 반복적 일상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대개 종교를 가지거나 한시적 쾌락에 탐닉한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기계화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그들은 안다. 돌이킬 수 없음을. 돌이킬 수 없이 기계화되어 버려서, '이유 없음'과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유 없음 보다는 이유 모름의 상태가 그들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이유를 모른다기 보다 이유를 아예 묻지 않는다. 아직 젊은 그들은 더 나은 미래-그것이 내일일지 10년 뒤일지 알지 못한 채-를 위해 열심히 '전략적 조건 탐색'과 협상을 위한 몸키우기(이른바 스펙이라는 무시무시한 용어로 통용되는)에 전념하고 있다. 자신들은 그것이 스스로의 선택이며 현명하고 어른스러운 삶의 방식이라 여길지 모르겠으나, 기실 그 삶이란 이미 코드화되어, 입력된 명령어대로 프로세서가 진행되는 것일 뿐이다. 하여 그들은 기계이며, 이 기계들이 시간이 흐른 뒤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근대가 낳은 지극히 그로테스크한 세상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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