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 다음

인간은 모든 순간마다 늘 '다음'을 생각한다. 아니, 다음을 살아간다. 이때의 주체는, 김수영을 비틀어 인용하자면, 온몸이다. '다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쓰여진 말인데, 이때의 생각이란 무의식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매우 형이상학적이고 심지어 불가능하기까지 한 말인데, '지금'이라는 사태는 인간의 현실(!)에는 전혀 존재하는 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금'은 늘 그것이 존립하는 순간 폐기된다. 따라서 그것이 실체화되어 시간의 한 단위로 혹은 지속의 한 단위로 막연하게 상정되어 말의 세계를 떠도는 것은 아이러니다. 인간의 시간이 지금과 그 다음이 뒤범벅된 채로 지속된다고 볼라치면, 인간이 꿈꾸는 미래라는 것의 가치가 곧 무효화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꿈꾸는 미래는, '다음'이 '지금'이 되는 순간 곧 폐기되기 때문이다. '다음을 생각한다'는 사태를 하이데거는 '기투Entwurf'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는데 이 기투는 늘 마음씀Sorge와 피투성Geworfenheit를 그림자로 달고 다닌다. 다시 말해, 다음을 생각함이란 늘 지나간 시간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그러므로 '지나간 미래'를 살아간다. ('지나간 미래'는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책 제목인데, 여기서의 차용은 그 책의 맥락과 아무 관련 없다.) 지나간 미래를 살아간다는 이 근본사태를 보면, '현실적'인 인간들이 상정하는 그 현실이란 것이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불분명해지며, 이로써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물음이 다시 표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현실이란 것이 동시에 지나간 것으로서, 미래로서 존재할 때, 인간은 무엇을 위해 '다음'의 행위를 해야 할 것인가? 저 먼 미래를 희생하겠다는 강요된 결의를 다진 채 직장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의 '현실'은 무엇으로 지탱되는가?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 혹은 소모적인 시간을 그대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의 현대인에게는 오지 않을, 꿈으로만 존재할 미래를 대신할 수 있는 '가상의 위안'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 가상의 위안들이 형성하는 위계서열 중에서 정점에 올라 있는 것이 마약과 컴퓨터일 터인데, 전자는 그 강렬함으로 후자는 그 일상성과 시공간압축성으로 대표된다. 마약은 실로 그 역사가 오래된 것인데, 거의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채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은 놀랄 만하다. 컴퓨터는 그것이 가진  기계적 인격성 때문에 사람들에게 '두려운 위안'을 선사해 주는데, 그 진화의 속도를 감안하면 곧 마약을 압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가상의 위안을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구원을 꿈꾸지 않거나, 몰입하는 것. '지금'으로선 이 두 가능성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 둘 가운데 전자는 사실 거의 불가능한데, 구원을 꿈꾸지 않는 것은 곧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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