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테오도르 아도르노(1903-1969)
- 생활정보
- 2007. 8. 20. 16:50
아도르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와인 판매업자와 가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부계 쪽 이름은 비젠그룬트이다. 음악학, 철학, 심리학, 그리고 사회학을 공부했으며 박사학위 논문은 후설에 대해 썼다. 이후에는 빈의 알반 베르크에게서 작곡을 사사받았으며, 음악이론 잡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1930년 죄렌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논문으로 파울 틸리히에게서 교수 자격을 취득했으며, 그 다음에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활동했다. 1934년에는 독일을 떠나야 했고, 옥스포드로 망명한 후 다시 4년 뒤에는 미국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사회연구소의 뉴욕 지부에 속해 일했고, 1941년부터는 로스엔젤레스에 살면서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계몽의 변증법>>을 집필했다.
이 책은 1947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고, 이로부터 4년 뒤에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를 출간한다. 1953년에는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올 수 있었고, 여기서 대학 철학교수 자리를 제안받았다. 여기서 비판적 합리주의(칼 포퍼)의 사상가들과 이론적으로 비판적인 대결에 참여했다. 이는 후에 이른바 실증주의 논쟁이라고 인구에 회자된다. 그 다음 출간 저작은 <<부정변증법>>(1961)과 <<미학 이론>>(1969)이었다. 그의 근본이념들 가운데 몇몇은 유태 문화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인데, 가령 구원의 빛에 대한 표상, 성서의 형상금지 혹은 모든 절망감에 대항하는 희망 등이 그것이다.
청소년 시절에 그는 유태 종교철학의 물음들을 단호히 거부했다. 프란츠 로젠츠바이크, 마르틴 부버, 그리고 에리히 프롬의 이념을 알게 되었지만, 거리를 두었다. 파울 틸리히를 통해서야 비로소 이론을 신뢰하게 되었으며, 희망없는 자들을 위한 희망의 모티브들에 대해 계속해서 몰입했다. 가난한 자들과 모든 피조물의 고통은 그를 아프게 했으며, 죽음을 존재하게 하는 원천적인 힘과 목적을 찾고자 했다. 무신론적 사유조차도 종교의 오랜 교리들과 장벽들도 관통할 수 있는이러한 힘을 없애지 못한다.
아도르노는 영원한 것에 대한 믿음의 붕괴 이후에는 오직 역사 서술에 안에서만 고통받는 자들의 호소와 과거 인류의 고통에 귀기울이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카발라 신비주의의 형상 언어 속에서도 지지될 수 없는 은폐된 진리가 있다. 구원받지 못한 세계 속에서도 계속 타오르는 불꽃을 가진 깨어진 항아리의 모티브는 성스러운 성서의 형상 금지 모티브와 결합된다. 이 두 개의 모티브는 <<계몽의 변증법>>안에 전개되어 있다. 역사와 미학의 철학, 그리고 합리주의적 계몽의 모순적 힘들은 내부의 긴장관계에 의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래하는 메시아의 유토피아적 이미지와 현존하는 사회관계들에 대한 비판 간에 존재하는 긴장이다.
이 속에 구원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 숨겨져 있다. 사회의 도덕적 타락의 역사과정을 제지할 수 있기 위해서 진리는 은폐와 형상 금지의 전략을 이용해야 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기독교의 인간주의적 신학교리에 반해 유태교의 신에 대한 표상에 있어서 형상 금지를 옹호한다. 아버지의 종교를 따르는 자들로서 유태인들은 아들의 종교를 따르는 자들인 기독교들에 의해 미움 받는다. 그들에 비해 근원적 진리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감각해진 인간 정신이 신의 정신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원한 진리는 이 불경함을 합리화하지 않고 저항한다. 화해의 기억이라는 사상 속에서 영원이 시간 속으로 틈입한다.
이 영원한 것이 유태 신앙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마법에서 위력을 빼앗는 데 성공한 것이다. 유태인의 성직자들은 인간이 자연에 동화되는 것을 철저히 뿌리뽑았으며, 제사의 의무를 지도록 했다. 화해의 기억을 통해 신화 전체가 극복된다. 형상 금지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구체적으로 표상하거나 그것을 구체적인 현재 혹은 미래에 결부시키는 것을 단념한다. 이로부터 역사의 수많은 희생자들을 구원하는 기억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형상 금지는 거짓이 진리처럼 숭앙받는 것을 방해한다.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하기 위한 선조건이다.
경솔한 위로에 대한 단념만이 우리를 현존하는 불공정한 사회 관계들에 대해 비판하도록 우리에게 촉구하며, 가능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게 한다. 아도르노는 계속해서 마치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있다는 듯이 세계를 바라보는 가정적인 메시아주의를 옹립한다. 사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메시아의 빛 속에서 발전해갈 수 있으며, 이 빛은 자의와 폭력 없이 비춰오는 것이다. 완전한 부정성 및 비판이야말로 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우리는 도덕적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 구별하는 힘은 사회적 실재들의 절망스런 내재관계들에 단순히 머무르지 않는 초월의 형식에 관계한다. 절망하는 자들을 위해서만이 희망은 존재하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여기서 쾌락주의적 세계관을 유물론적 세계관과 결합시킨다. 인간의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자 정신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부정 신학을 매개로 해서만 기독교의 위험한 우상숭배가 극복될 수 있다. 신의 이름은 그의 형상 없음 자체 속에서 무신론적 기호로 확정되어야 한다. 홀로코스트의 충격 이후 유태인의 신도 저 최종적 현실에서 최종적 가능성으로 전락했다. 절망스런 상황 앞에서도 우리 피조물에게는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소망이 남아 있다. 부정의 사유는 그 추락의 순간에 있어서는 형이상학과 동일하다. 구원에 대한 추측된 진리는 굴욕당한 자들과 노예된 자들에게 항상 훨씬 더 멀리 생각하고 희망하는 것을 허락해 준다. 신과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은 형상금지에도 불구하고 열려져 있다.
이 책은 1947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고, 이로부터 4년 뒤에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를 출간한다. 1953년에는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올 수 있었고, 여기서 대학 철학교수 자리를 제안받았다. 여기서 비판적 합리주의(칼 포퍼)의 사상가들과 이론적으로 비판적인 대결에 참여했다. 이는 후에 이른바 실증주의 논쟁이라고 인구에 회자된다. 그 다음 출간 저작은 <<부정변증법>>(1961)과 <<미학 이론>>(1969)이었다. 그의 근본이념들 가운데 몇몇은 유태 문화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인데, 가령 구원의 빛에 대한 표상, 성서의 형상금지 혹은 모든 절망감에 대항하는 희망 등이 그것이다.
청소년 시절에 그는 유태 종교철학의 물음들을 단호히 거부했다. 프란츠 로젠츠바이크, 마르틴 부버, 그리고 에리히 프롬의 이념을 알게 되었지만, 거리를 두었다. 파울 틸리히를 통해서야 비로소 이론을 신뢰하게 되었으며, 희망없는 자들을 위한 희망의 모티브들에 대해 계속해서 몰입했다. 가난한 자들과 모든 피조물의 고통은 그를 아프게 했으며, 죽음을 존재하게 하는 원천적인 힘과 목적을 찾고자 했다. 무신론적 사유조차도 종교의 오랜 교리들과 장벽들도 관통할 수 있는이러한 힘을 없애지 못한다.
아도르노는 영원한 것에 대한 믿음의 붕괴 이후에는 오직 역사 서술에 안에서만 고통받는 자들의 호소와 과거 인류의 고통에 귀기울이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카발라 신비주의의 형상 언어 속에서도 지지될 수 없는 은폐된 진리가 있다. 구원받지 못한 세계 속에서도 계속 타오르는 불꽃을 가진 깨어진 항아리의 모티브는 성스러운 성서의 형상 금지 모티브와 결합된다. 이 두 개의 모티브는 <<계몽의 변증법>>안에 전개되어 있다. 역사와 미학의 철학, 그리고 합리주의적 계몽의 모순적 힘들은 내부의 긴장관계에 의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래하는 메시아의 유토피아적 이미지와 현존하는 사회관계들에 대한 비판 간에 존재하는 긴장이다.
이 속에 구원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 숨겨져 있다. 사회의 도덕적 타락의 역사과정을 제지할 수 있기 위해서 진리는 은폐와 형상 금지의 전략을 이용해야 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기독교의 인간주의적 신학교리에 반해 유태교의 신에 대한 표상에 있어서 형상 금지를 옹호한다. 아버지의 종교를 따르는 자들로서 유태인들은 아들의 종교를 따르는 자들인 기독교들에 의해 미움 받는다. 그들에 비해 근원적 진리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감각해진 인간 정신이 신의 정신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원한 진리는 이 불경함을 합리화하지 않고 저항한다. 화해의 기억이라는 사상 속에서 영원이 시간 속으로 틈입한다.
이 영원한 것이 유태 신앙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마법에서 위력을 빼앗는 데 성공한 것이다. 유태인의 성직자들은 인간이 자연에 동화되는 것을 철저히 뿌리뽑았으며, 제사의 의무를 지도록 했다. 화해의 기억을 통해 신화 전체가 극복된다. 형상 금지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구체적으로 표상하거나 그것을 구체적인 현재 혹은 미래에 결부시키는 것을 단념한다. 이로부터 역사의 수많은 희생자들을 구원하는 기억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형상 금지는 거짓이 진리처럼 숭앙받는 것을 방해한다.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하기 위한 선조건이다.
경솔한 위로에 대한 단념만이 우리를 현존하는 불공정한 사회 관계들에 대해 비판하도록 우리에게 촉구하며, 가능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게 한다. 아도르노는 계속해서 마치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있다는 듯이 세계를 바라보는 가정적인 메시아주의를 옹립한다. 사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메시아의 빛 속에서 발전해갈 수 있으며, 이 빛은 자의와 폭력 없이 비춰오는 것이다. 완전한 부정성 및 비판이야말로 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우리는 도덕적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 구별하는 힘은 사회적 실재들의 절망스런 내재관계들에 단순히 머무르지 않는 초월의 형식에 관계한다. 절망하는 자들을 위해서만이 희망은 존재하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여기서 쾌락주의적 세계관을 유물론적 세계관과 결합시킨다. 인간의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자 정신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부정 신학을 매개로 해서만 기독교의 위험한 우상숭배가 극복될 수 있다. 신의 이름은 그의 형상 없음 자체 속에서 무신론적 기호로 확정되어야 한다. 홀로코스트의 충격 이후 유태인의 신도 저 최종적 현실에서 최종적 가능성으로 전락했다. 절망스런 상황 앞에서도 우리 피조물에게는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소망이 남아 있다. 부정의 사유는 그 추락의 순간에 있어서는 형이상학과 동일하다. 구원에 대한 추측된 진리는 굴욕당한 자들과 노예된 자들에게 항상 훨씬 더 멀리 생각하고 희망하는 것을 허락해 준다. 신과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은 형상금지에도 불구하고 열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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