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장 자크 루소(1712-1778)
- 생활정보
- 2007. 7. 22. 03:35
배타적인 합리적 계몽주의에 대한 이 비판가는 1712년에서 1778년까지 살았다. 그는 칼뱅주의적 도시인 제네바 출신이지만, 투랭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했다가 후에 다시 칼뱅주의로 회귀했다. 리옹의 아카데미에서 제기된, 학문과 예술은 도덕의 개선을 위해 기여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한 논문에서 반박했다. 철학적 저술가로서 세 개의 위대한 저작을 남겼다. <<신 엘로이즈>>, <<사회계약론>>, 그리고 교유적 소설인 <<에밀>>.
그는 포괄적인 교양인이었으며 계몽주의의 이념을 따랐다. 그러나 배타적으로 합리성만을 추동하는 데에는 등을 돌렸으며, 이성보다는 감정이 더 강력한 것이라 평가했다. 이로써 그는 반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자연에 대한 경탄과 무한한 것에 대한 동경이 그의 사상을 탄생시켰다. 모든 인간은 본래적으로 자유롭게 태어났으며, 모든 개인의 삶 속에서 자유가 실현되어야 한다. 자유는 인간 본성의 근본규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의지의 자발성, 자기보존, 그리고 자기애가 중요한 것이 되었다. 이성에 대한 과대평가는 우리의 자연스런 삶을 방해하므로 우리는 지식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덕은 항상 학문보다 높은 것으로서 건전한 상식의 기반 위에서 지어진다. 학문의 강제들은 삶의 자발성에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참되 철학은 자연에 맞게 사는 것이며, 개인의 양심에 기반해 있는 것이다. 덕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쓰여져 있다. 그러나 과도해진 학문과 지속적인 진보에 대한 믿음은 덕의 붕괴에 기여한다.
루소는 유신론자이며, 지고의 신적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내면의 종교"를 추구했고, 여기서 교리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종교란 항상 우리의 감정들로부터 자라나오는 것이다. 우주는 이성적 의지에 의해 움직이며, 이 의지는 지성과 결합된 신의 의지이다. 따라서 자연 안의 모든 것은 합목적적으로 질서지어져 있으며, 인간에게는 자유가 주어졌다. 지식은 우리의 결정에 있어서 최고의 심급이지만,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신의 손에 의해 창조된 모든 것은 선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원죄"란 없다. 우리의 영혼은 불멸하며, 죽음의 한계 저편에서 우리의 행동들은 심판받는다. 거기서는 중단되었던 질서가 다시 생성된다. 나의 양심이 선한 것으로 판단한 것은 나에게 좋은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기만하지 않으며, 다만 오성만이 그렇게 할 뿐이다. 따라서 덕은 자연적 질서에 대한 사랑에서 성립한다.
교육의 목표는 인간의 자연적이고 근원적인 성향을 완전히 펼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우리의 자연스런 욕구들에 상응하는 도덕적 가치들은 앎으로 전수되어야 한다. 전인교육은 우리의 삶을 강화해 주며,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을 다시 찾아야 한다. 인간 본성의 소질은 선하지만, 불행한 환경에 의해 종종 방해받는다. 모든 인간은 삶을 스스로 만들고 서로 간에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인격적인 권위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국가의 사회적 질서는 시민의 도덕에 기초한 것이다. 억압된 사람들은 사회의 강제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더 나은 사회적 관계들은 가능하며, 사회적 불평등이 지금처럼 심하면 안 된다. 이상적인 "원시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능을 따른다. 그들은 단순하게 자족하며 여유와 평화로움 속에 살았다. 그러나 노동분화와 사유재산의 인정과 함께 사회적 불평등과 부자유가 도래했다. 그 이후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노예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불공평한 사회계약"이다.
사회계약에 있어서 개개인은 강한 자들의 법질서에 복종한다. 이로써 그는 안전을 보장받고 법질서 내에서의 상대적인 자유를 얻는다. 국가의 법은 "일반의지"를 표현한다. 개인의 자유는 법에 의해 보장된다. 국가의 목적은 공공복지이며, 따라서 개인의 행복에 반하여 집행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시민은 법에 복종해야 한다.
법은 직접민주주의와 투표를 통해 만들어져야 한다. 절대군주제는 극복되어야 한다. 민중의 의지를 억누르기 때문이다. 경제에 있어선는 농업이 장려된다. 농업이 가장 자연스런 삶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기술과 산업, 상업과 자본축적은 삶의 자연스러운 근원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연적 욕구들을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행복은 소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내면적 관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치스런 삶은 사회적 균형을 깨트린다. 모든 사람은 자급자족하며 분수에 맞게 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래서 루소는 시민들의 욕구충족이 낮은 수준에 머무르던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형태를 옹호했다. 강한 자들이 끊임없이 권력과 재산과 자본을 끌어모은다면, 사회의 평화는 심각하게 훼손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근원적이고 자연적인 삶의 형식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국가도 가족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가족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모든 사회적 의무가 실현된다. 그들은 삶의 공동 목적을 추구한다. 경제는 항상 도덕적 원칙들을 필요로 하며, 이로써 국가가 부자들에 의존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경제적인 보수주의 때문에 루소는 이른바 인간의 자연상태를 이상적으로 보는 초기의 사회낭만주의자가 된다. 낭만주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이념에서 루소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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