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루트비히 포이어바흐(1804-1872)
- 생활정보
- 2007. 7. 29. 20:23
포이어바흐에게는 일생 동안 종교철학과 종교비판이 그의 철학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 잡아서 다른 영역들에 대한 그의 작업은 주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의 종교비판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 여겨지고 따라서 절대적인 것으로 개념화된 존재에로 투사되는 인간의 소망과 희망을 드러내 보여주는 심리학적인 방법이 중요했다. 이 존재는 단지 추상체일 뿐 아니라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포이어바흐가 "소외"라는 개념으로써 생각했던 무엇이다. 인간은 신(들)을 개념화하며, 이들에게는 더 큰 완전성의 속성이 부여되고, 초인간적인 존재, 먼저 질서잡고 창조하는 존재(나중에 질서지어지거나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로 나타난다. 이로써 인간성과 신성의 관계구성은 완전히 뒤집어진다!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신이 "우리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우리의 모습에 따라 신을 만들라"고 말한다.(이러한 사유는 이미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에게서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신의 이미지에 절대적인 요소들이 부가되었고, 그리하여 오늘날의 인간들에게 그것은 "toto genere"한 상이한 것으로서, 그리고 모든 점에서 먼저 질서잡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투사와 절대화의 과정은 실재세계의 압박으로부터 도망하며 초월속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목적에 기여한다. 신은 내재를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은 인간의 무덤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설명하는데, 이는 인간은 다만 신에 대한 믿음 속에서만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생에 대한 소망을 보장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인간의 유아적 본질이 표현된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소망을 실현시키지 못하며,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의지하는 존재인 동시에 다른 한편 전능한 존재인 것으로 보이는 존재(대개는 아빠와 엄마일 텐데)에게 도움을 청한다. 종교는 원천적으로 나중에 몇몇 학문의 발전에서 상정된 것과 같은 목적을 충족시킨 것이었을 게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격언: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러나 모든 학적 인식은 종교의 약속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진보적 낙관주의자였던) 포이어바흐는 맹렬히 발전하는 학문이 이러한 모순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인간이 초월을 향해 투사한( 따라서 실현불가능한) 소망을 체현한 신의 자리에 인간 자신을 앉히게 될 시간이 올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종교의 자리에는 교양이 들어설 것이다. 그래서 그의 생각에 따르면, 다시 한번 인류가 예전에 (무지 때문에) 도덕의 요청을, 복종에는 보상을 반항에는 형벌을 선포했던 신의 계명으로 파악했던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느낄 때가 언젠가는 오게 될 것이었다.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립에 대한 입장이 전도되게 된다. 즉 유신론은 파괴적인 것이 되고, 무신론은 건설적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모든 도덕의 조건으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은 도덕적 허무주의에 대한 믿음과 같다. 이에 반해 무신론은 긍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생각과 환상의 고안물인 "신"을 현실적인 삶을 위해 희생시키고, 이로써 인간에게 유신론이 갈취해 갔던 의미를 되돌려준다. 이로써 우리는 포이어바흐적 윤리학의 본질적 특성을, 수많은 규정들 가운데 특히 종교적 규정과의 대비하에 그가 자신의 주요의도 즉 신을 공상과 사변의 산물이라 증명하려는 의도에 걸맞게 사실적 사건들의 현실을 순수한 개념적 사변보다 우위에 두려고 한 데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실제로 행위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로 보려고 했으며,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인류학적 정의들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서 출발하고자 했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그의 윤리학에서의 결정적인 지점, 즉 행복에 대해 도덕이 가지는 의미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가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시대의 수많은 철학자들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은 도덕적 행위를 하기 위한 토대이다. 이러한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욕구라 하는 것이 더 나을 텐데)은 모든 인간의 근본소질이다. 그렇지만 그는 개인에 대해서만 관심을 둔다. 따라서 그는 도덕 규범은 내적 규정을 가진다고 보았다. 도덕의 주된 과제는 개인의 행복에 대한 욕구를 다른 이들의 그것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더 많은 권력과 돈을 향한 나의 소망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한계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에 관련해서는 더 나아가 중요한 기독교적 원리, 즉 자살에 대한 엄격한 금지에 대해 의심한다. 그러한 관점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관점과는 구별되게) 당시에 전혀 옹호되지 못했다. 그에게는 자살이 절망적 상황으로부터의 마지막 탈출구이자 행복에 대한 욕구의 표현이었다.
그가 다른 철학자들처럼 그저 세계를 해석할 뿐이라고, 다시 말해 사회적 차원을 경시했다는 이유로 다른 헤겔좌파들(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서 비난받았지만, 이는 그가 빈번히 날카로운 형식으로 당대의 사회적 폐해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했으며 비도덕과 가난 사이에 인과적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로 반론에 부딪힌다. 그가 항상 기독교 신앙공동체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는 사실은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모든 학적 고찰들 가운데 강조되는 신학에 대한 비판이 그를 "적그리스도교도"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종교파괴자"로 부르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그래서 그는 신은 인간의 무덤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설명하는데, 이는 인간은 다만 신에 대한 믿음 속에서만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생에 대한 소망을 보장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인간의 유아적 본질이 표현된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소망을 실현시키지 못하며,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의지하는 존재인 동시에 다른 한편 전능한 존재인 것으로 보이는 존재(대개는 아빠와 엄마일 텐데)에게 도움을 청한다. 종교는 원천적으로 나중에 몇몇 학문의 발전에서 상정된 것과 같은 목적을 충족시킨 것이었을 게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격언: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러나 모든 학적 인식은 종교의 약속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진보적 낙관주의자였던) 포이어바흐는 맹렬히 발전하는 학문이 이러한 모순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인간이 초월을 향해 투사한( 따라서 실현불가능한) 소망을 체현한 신의 자리에 인간 자신을 앉히게 될 시간이 올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종교의 자리에는 교양이 들어설 것이다. 그래서 그의 생각에 따르면, 다시 한번 인류가 예전에 (무지 때문에) 도덕의 요청을, 복종에는 보상을 반항에는 형벌을 선포했던 신의 계명으로 파악했던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느낄 때가 언젠가는 오게 될 것이었다.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립에 대한 입장이 전도되게 된다. 즉 유신론은 파괴적인 것이 되고, 무신론은 건설적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모든 도덕의 조건으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은 도덕적 허무주의에 대한 믿음과 같다. 이에 반해 무신론은 긍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생각과 환상의 고안물인 "신"을 현실적인 삶을 위해 희생시키고, 이로써 인간에게 유신론이 갈취해 갔던 의미를 되돌려준다. 이로써 우리는 포이어바흐적 윤리학의 본질적 특성을, 수많은 규정들 가운데 특히 종교적 규정과의 대비하에 그가 자신의 주요의도 즉 신을 공상과 사변의 산물이라 증명하려는 의도에 걸맞게 사실적 사건들의 현실을 순수한 개념적 사변보다 우위에 두려고 한 데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실제로 행위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로 보려고 했으며,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인류학적 정의들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서 출발하고자 했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그의 윤리학에서의 결정적인 지점, 즉 행복에 대해 도덕이 가지는 의미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가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시대의 수많은 철학자들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은 도덕적 행위를 하기 위한 토대이다. 이러한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욕구라 하는 것이 더 나을 텐데)은 모든 인간의 근본소질이다. 그렇지만 그는 개인에 대해서만 관심을 둔다. 따라서 그는 도덕 규범은 내적 규정을 가진다고 보았다. 도덕의 주된 과제는 개인의 행복에 대한 욕구를 다른 이들의 그것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더 많은 권력과 돈을 향한 나의 소망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한계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에 관련해서는 더 나아가 중요한 기독교적 원리, 즉 자살에 대한 엄격한 금지에 대해 의심한다. 그러한 관점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관점과는 구별되게) 당시에 전혀 옹호되지 못했다. 그에게는 자살이 절망적 상황으로부터의 마지막 탈출구이자 행복에 대한 욕구의 표현이었다.
그가 다른 철학자들처럼 그저 세계를 해석할 뿐이라고, 다시 말해 사회적 차원을 경시했다는 이유로 다른 헤겔좌파들(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서 비난받았지만, 이는 그가 빈번히 날카로운 형식으로 당대의 사회적 폐해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했으며 비도덕과 가난 사이에 인과적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로 반론에 부딪힌다. 그가 항상 기독교 신앙공동체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는 사실은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모든 학적 고찰들 가운데 강조되는 신학에 대한 비판이 그를 "적그리스도교도"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종교파괴자"로 부르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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