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리차드 로티(1931~)

로티는 실용주의 철학의 단초들을 포스트모던적인 사유의 조건들과 결부시킨다. 그가 보기에 철학은 전혀 정밀한 학문이 아닌데, 그것은 철학이 검증의 기준을 갖고 있지 못한 까닭이다. 철학은 오히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언어적 표상을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예술과 같은 것이다. 모든 문화 안에서 철학은 세계해석의 적절한 형식에 대한 담론을 열어놓는다. 우리는 의식으로써는 결코 체험된 자연을 반영하지 못하며, 특정한 경험과 생활세계의 문맥 속에서 우리의 삶을 해석할 뿐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의 언어적 재현에 대한 분석철학의 많은 이론들은 너무 편협하다. 오늘날 물리학의 지식에 따르면 주관과 객관의 구별은 더 이상 자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과 물질의 날카로운 분리도 더 이상 정당화되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인식하는 주관과 특정되는 대상의 상호작용을 고려해야 한다. 낡은 분리는 그릇된 언어사용의 결과이다.

그래서 로티는 실용주의적 전향 이후의 비트겐슈타인에 근접해 가는데, 비트겐슈타인의 전향에는 윌리엄 제임스에게 자극받은 것이었다. 이제 포스트모던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는 세계에 대한 다양한 기술의 방식, 서로 경쟁하는 많은 "언어게임"들과 관계맺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들의 수행능력은 그것들이 인간 삶에 실제로 끼치는 영향과 결과들 속에서 드러난다. 우리의 삶이 형성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세계와 실재에 대한 어떤 해석모델이 더 좋고 혹은 더 나쁜 것인가를 확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학적 인식의 과정에 있어서도 우리는 모든 인식양태의 원칙적인 상대성을 넘어설 수 없다.

인식론적 출발부터가 모든 가능한 지식이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학문적 이론의 완전한 증명을 위해서는 이러한 경험은 충분치 않다. 그러한 증명은 세계와 우리의 현존에 대한 철학적 이론들에 대해서는 전혀 불가능하다. 자연과학의 새로운 인식들은 형이상학적 물음들에 반하는 우리의 낡은 선입견들이 전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문의 과제는 개별분과들에 대한 경험적이고 논리적인 시험을 통해 언제나 상대적인 인식 속에서 적절한 진보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관계는 모든 영역에서 폐기되어야 하는데, 철학은 우리의 발화방식과 세계해석 간의 결합만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언어에 대한 주목은 우리가 이러한 해석을 인식하고 현대 논리학을 매개로 심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를 통해 전통적 사유의 잘못된 길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언어는 경험적 사유에 있어서도 중심적 주제로 남는다. 실용주의 사상가들이 모든 인식의 진리를 사회적 연대성에 기초짓는 데 반해 인식의 실재론자들은 참된 통찰을 객관성 위에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 안에서 합리성의 규칙은 상대적 규범들을 통해 정의된다. 진보하는 인식의 과정 속에서 인식된 진리는 결코 의도와 지향, 그리고 권력에 대한 관심과 분리될 수 없다. 객관성에 대한 고집스런 노력은 공동체의 죽음에 대한 불안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 민주주의를 이끌었던 유럽 계몽주의의 희망은 포스트모던의 시대에는 겸허한 방식으로만 계속 펼쳐질 수 있을 뿐이다.

로티는 철학적 토론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고 싶어했다. 고정된 틀 속에서의 사유는 유용하지도 창조적이지도 못하다고 여겼다. 어떤 철학적 입장이 학자집단과 사회를 위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결정적인 물음이 중요하다. 모든 창조적 사유과정에서 인간의 자기이미지는 변화하게 마련이며, 철학은 항상 사회적 문화적 과정에 대해 반응할 뿐이다. 철학은 민주주의 안에서 체험된 자유를 위해 유용해 지려고 낡은 사유틀을 새로운 해석과 결합시키려 한다.

오늘날에는 분석철학의 일면성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 정확히 보자면 언어철학을 자연과학에 비유해서 정밀한 학문분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학적 전회"는 철학의 역사를 경시했지만,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 다급하게 수정되고 있다. 실용주의적인 사유방식과 실존주의적인 그것은 서로 보충될 수 있으며, 생철학과 이상주의도 그것들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실용주의 사상가는 발생연관 뿐 아니라 철학적 관념의 결과에도 주목한다. 그들은 결코 비역사적으로 문맥을 떠나서 사유하는 법이 없다.

오늘날 경제적 세계화의 시대에 사회정의에 대한 토론은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우리가 계속해서 훌륭한 방식으로 노동과 자본을 제3세계로 이동시킨다면, 국가 간의 복지상태의 낙차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구의 나라들에서 민주주의와 삶의 형식의 자유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모든 국민을 위한 사회적 제도를 보장하기에는 돈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비판철학은 이러한 문제들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되며, 다른 학문들과 함께 적절하고 실천적인 해답을 내기 위해 힘써야 한다. 담론의 윤리학은 세계적이고 간문화적인 사회 정의를 더 확실히 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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