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마르틴 부버

페르디난트 에브너와 프란츠 로젠츠바이크 외에 특히 마르틴 부버가 대화의 철학에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1916년부터 씌어졌고 1923년에 출간된 그의 <<나와 너>>로써 부버는 자신의 고유한 대화의 철학을 위한 프로그램이 된 것만은 아닌 하나의 작품을 내어놓은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아와 자아에 맞서 있는 것 사이의 각기 다른 관계를 표시하는 두 개의 근본어휘를 구분한다. 이와 달리 근본어휘 "나-그것"은 대상에 대한 자아의 지향적 관계를 나타낸다. 근본어휘 "나-너"는 다른 인간에 대한 객관적 접근이 아니라 직접적 만남을 의도한다. 여기서 타인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너에 의해 이야기되고 나의 편에서 직접적으로 맞서 있는 너에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것은 대상을 갖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서있는 것이다.

부버에게 세계에 대한 근본적 관계는 언어적인 것이다. 자신들 쪽에서는 사물의 질서 속에 서로 마주보고 서있는 두 개의 근본어휘가 이를 보여준다. 그가 보기에 현실적인 삶이란 '나와 너' 사이의 조건이지, 그 속에서 내가 다른 누군가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 애쓰는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나'로부터 '나-그것'이라는 근본어휘를 떨쳐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토대는 근본어휘 '나-너'이다. "그것 없이 인간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지만, '너-관계' 없이 그는 전혀 인간일 수 없다." 이는 '나-그것'이라는 근본어휘 속에서는 한갓 주체가 객체에 맞서 있을 뿐이지만, '나-너' 속에서는 두 인격이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사이", 말하자면 두 인격 가운데 하나의 객관화하는 간섭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 인격적 만남의 공간이 열리게 된다. 오히려 부버는 '나-그것'의 관계를 통해서는 도달될 수 없는 서로간의 직접성과 두 사람 사이의 인격적 현전화를 강조한다.

원리적으로 나-너-관계는 호혜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동시에 어떤 다른 인격에게는 '너'이며, 거꾸로 '너' 역시 '나'가 될 수 있다. 특히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윤리학적 단초 속에서 비판받은 '나'와 '너' 사이의 이러한 대칭성이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구별을 뭉개버리는 것은 아니다. '나'는 두 개의 근본어휘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너'의 참된 '나'-되기는 필요하다. "인간은 '너'에서 '나'가 된다." 그에게 타인을 '너'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전체적인 '나'가 된다.

부버는 물론 순수한 인간 간의 관계로 끝맺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들 사이의 모든 만남 속에서는 "영원한 너"를 함께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누군가가 다른 인격을 "너"라고 부르면 그와 함께 신을 부른 것이 된다. 부버는 신에 대해 인간들 사이 저편의 어떤 고유한 만남의 공간을 보지는 않았다. 신은 인간들이 서로 관계 속에 있는 곳이면 어디든 편재한다. 그래서 부버는 신을 대상으로 만들고 그리하여 타인에 대한 객관화가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직접성을 기만하듯이 신과의 만남을 무력하게 만드는 신학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부버는 철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종교의 문제를 다루었다. 하디시즘이 그의 관심의 중심을 차지한다. 우선 그는 자료들을 모아서 18세기 동유럽의 유태교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던 이 유태적 경건운동에 대한 텍스트를 편집하고 해석했다. 그는 렘베르크에서 자랐고 여기서 나중에  하시디즘의 형식들을 스스로 알아내었다. 하시디즘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이스라엘 벤 일리에세라는 랍비의 저작을 통해 종교적으로 토대잡힌 유태교의 옹호자가 되었다. 이는 하시디즘에 대한 부버의 작업이 근본적으로 전혀 순수한 역사적 학문적 작업이 되지 못하게 했으며, 이 작업의 일면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게르숌 숄렘이 비판을 가했다. 부버는 하시디즘에서 인간을 중심에 둔 종교성을 획득하여 전도하고자 하였다. 그는 정치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유태인 학생 그룹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테오도르 헤르츨의 시오니즘적 운동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과 구별되는 것은 부버가 민족주의적 시오니즘에는 관심이 없었고, 유태교의 정신적 종교적 측면에 타당성을 부여하고자 애썼다는 점이다. 교수자격을 박탈당하기 전에 1933년 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종교철학 및 유태 윤리학에 대한 명예교수직을 그만두고 대학 외부에서 가르침에 헌신했다. 예를 들면 "유태 성인교육을 위한 중심지"를 건립해서 1938년 예루살렘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끌었다.

대략 1917년부터 부버는 히브리어 성서를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에 골몰했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유태인 학교에서 함께 일했던 프란츠 로젠츠바이크와 함께 자신의 계획을 사실상 바꾸었다. 부버는 위대한 성서번역을 통해 근원적인 개념성과 그에 따른  성서의 사유 및 성서언어의 금언들이 약화되었다고 보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부버가 본래적 의미에서의 번역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에서 먼저 정해진 소리들을 추적하고 성서 언어의 낯설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도록 성서를 "독일어화"하기 위해 애쓰게끔 하였다. 그는 성서 언어의 구어성이 새로운 울림을 얻도록 뒷받침하고 싶었다. 1929년 프란츠 로젠츠바이크의 죽음 이후에 혼자서 번역을 계속하여 1961년에 끝을 맺었다.

부버는 철학적인 학파를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객관화된 이론에 대립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각각의 만남이었다. 그럼에도 "대화의 원리"에 대한 그의 사상은 특히 철학, 신학, 그리고 사회학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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