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mpendium

"인간의 정신적 삶을 표출한 것은 모두 일종의 언어로 파악될 수 있다"고 벤야민은 말했다. 이러한 언급은 노발리스의 "인간만이 말하는 건 아니다-우주도 말한다-모든 것이 말한다"라는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으로는 아주 특이하고 남다른 의미에서, 또 한편으로는 그 말의 아주 본래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벤야민을 낭만주의의 아들이라 부를 수 있다. 아들은 아버지를 많이 닮지만, 그러나 아버지의 삶과는 독립된,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벤야민이 낭만주의의 아들이라는 진술은 아버지로서의 낭만주의의 삶이 어떠한 것이었고, 또 그 아들인 벤야민은 어떤 점에서 어떻게 아버지를 닮았고 동시에 어떻게 아버지의 궤적을 벗어나서 고유한 삶을 엮어나갔는가 하는 데 대한 상세한 서술을 요구한다고 하겠다. 물론 그러한 서술이 단순히 닮음, 즉 유사성의 확인만을 목표로 하는 것일 경우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한 확인의 작업은 오히려 서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때 '서술'은 벤야민이 의도한 바대로의 서술이 되기 위해 자기자신, 즉 서술 자체에 대한 반성을 동반하는 것이되어야 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 말을 세속화된 형태로 달리 표현해보면, 서술은 자신의 의도와 전략을 충실히 반영한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로써 이 논문의 서술이 목표로 하고 있는 바가  벤야민의 비평 전략, 글쓰기 전략에 대한 연구가 적절히 암시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이 논문은 벤야민의 서술전략에 대한 탐구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서술전략의 개별적 수행이 되고자 한다. 이 의도가 성공적이 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아마도 연구범위의 제한일 것이다. 왜냐하면 벤야민은 그 사유의 스펙트럼이 너무나도 넓어서, 섣부른 욕심과 열정으로 그 스펙트럼을 모두 정복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이를 늪에 빠뜨리기에 아주 적절한 연구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그래서 벤야민의 방대한 저작 가운데서 그의 언어형이상학에 관련된 텍스트와 보들레르, 프루스트, 카프카에 대한 비평적 에세이만을 주로 다루고자 한다.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는 <전기낭만주의에 있어서 비평의 개념>(그의 박사학위 논문),<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가의 과제>, <유사성론>, <<독일비극의 원천>>가운데 <인식비판서문> 등이 있다.

전기낭만주의는 18,19세기의 독일이라는 상황 속에서 특히 독일 관념론이라 불리는 사상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독일 관념론은 칸트가 열어젖힌 드넓은 문제의 지평 속에서 비슷한 듯 다른 여러가지 사유체계들을 발전시킨 거대한 운동이다. 전기낭만주의는 크게 보면 이 운동의 흐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러나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서만 그러하다. 벤야민은 이러한 전기낭만주의의 사유를 박사학위연구를 통해서 면밀히 연구했으며, 또한 그것이 갖는 장단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벤야민의 독특한 사유는 본래적으로 전기낭만주의의 언어형이상학적 뿌리에서 자라나온 것이며, 따라서 그 중요성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전기낭만주의의 주요이론가들인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노발리스에 더해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인물로 우리는 하만과 헤르더를 들 수 있다. 특히 하만의 언어이론은 벤야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본 논문의 제 1부에서는 이들의 언어철학이 어떤 전선에 맞대고 있었으며, 또 어떤 사유방식을 전개해 나갔는가에 대해 다루어지며, 이어서 벤야민의 언어철학은 어떻게 이들을 계승하고 또 극복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찰된다. 이를 요약하면, 벤야민의 언어형이상학의 형성과 전개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있겠다.

제 2부에서는 벤야민이 이러한 언어형이상학적 전통에 서서 비평을 가하는 대상, 즉 보들레르, 프루스트, 카프카에 대한 벤야민의 비평적 에세이를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벤야민이 자신의 아버지(들)를 어떻게 부활시키고 또 동시에 극복하는가 하는 점이 더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보들레르의 시에 대한 에세이에서 핵심적인 개념을 차지하는 것은 경험(/체험), 군중(도시), 충격 등이며, 프루스트에 대한 글에서는 기억, 꿈, 상호교감, 유사성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본문에서 상술되겠지만, 이러한 개념들은 전기낭만주의와 친연성을 갖고 있는 것들이다. 이로써 아주 희미하게나마 벤야민의 사유궤적 또한 어떤 일관된 흐름을 갖고 있다는 점이 밝혀질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확보된다. 카프카에 대한 글을 분석하는 것은 앞의 두 사람에 대한 것보다 훨씬 힘든 작업이 될 터인데, 그것은 무엇보다 카프카가 벤야민과 더불어 유대교의 전통을 사유의 한 축으로 삼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유대교 전통, 더 자세히는 카발라에 대한 언급은 이 글을 쓰는 이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보들레르와 프루스트, 카프카는 모두 흔히 모더니즘이라 불리는 미학의 흐름에 속하는 작가들로 분류된다. 이러한 분류의 거친 성격에 대한 논의는 불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이 세 작가가  처해 있는 상황이 중요하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세 작가가 처해 있는 상황은-그것들이 각각 서로 다르고 특수하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한 공통점이 무엇이냐 하는 데 대한 해명은 낭만주의의 아들 벤야민이 자신의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해명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벤야민과 마르크스의 관계가 전면에 떠오른다. 즉, 보들레르, 프루스트, 카프카 그리고 벤야민이 살았던 시대는 마르크스가 분석해낸 교환가치의 위력이 점점 거세어지던 시대였던 것이다. (이때 프루스트, 카프카, 벤야민에 비해 보들레르가 한 세대 정도 앞선다는 점은 여기서 큰 중요성을 가지지 못한다.) 교환가치는 삶과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가치의 붕괴를 가져왔고, 그러한 가치들의 폐허 속에서 그 폐허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는 점이 이들의 가장 근본적인 공통점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벤야민을 그의 아버지들과 구분짓게 하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요컨대, 낙천적 굼을 꿀 수 있었던 낭만주의자들과는 달리 벤야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순가도 낙천적일 수 없었고, 철저한 비관주의 속에서 단지 희미하고 순간적인 구원의 표지만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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