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tgenstein's Vienna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뿌리에는 이기주의가 놓여 있다. 그들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왜냐햐면 사람들은 눈앞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사회적 역할들 속에 자신을 절망적으로 가뒤 버림으로써 좀더 영속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모든 희망을 스스로 박탈해 버리기 때문이다. (97)

경주자 둘이 시간의 주로를 달린다,
한쪽은 분별이 없고, 다른 한쪽은 두려운 마음으로 발을 내딛는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자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다. 다른 한쪽은-
기원에서 출발한 그는-도중에 죽는다.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자는, 이긴 자는, 자리를 양보한다.
늘 두려움 속에 발을 내딛으며, 그리고 늘
자기의 종착점, 다름 아닌  그 기원에 도착하는 자에게. (117)

이러한 언어 신비주의는, 완벽한 풍자란 풍자되고 있는 진술들을 전혀 바꿔 놓지 않으면서도 단지 그것에 빛을 비추어 그 안에 숨겨진 위선을 폭로하는 작업임을 함의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다른 모든 작가들의 생각과는 달리(아마도 네스트로이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크라우스는 모든 진술은, 소위 도덕성과의 "예정된 조화"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원리로 인해 언외言外의 도덕적 차원을 가진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었다. (145)

우리의 삶이 놓여 있는 토대는 얼마나 어두운가?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우리의 길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가? 쇼펜하우어의 생각처럼, 나는 내가 미처 머리에 떠올리기도 전에 벌써 이러한 삶을 진정으로 원하게끔 되어있다는 말인가? 나는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여전히 나의 성격 안에 속박되어 있는데, 어째서 나는 내가 자유롭다고 느끼게 되는 것일까? 고초와 슬픔의 목적은 무엇인가? 자애로운 하느님의 피조물에게서 드러나는 잔혹성과 죄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인생의 의미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가? (180)

그것은 이른바 오해라는 현상이다. 언어는, 사람들이 "행위할 때" 그들 사이의 매개자가 된다는 바로 그 이유로, 오히려 사람들이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할 때"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대양이 대륙을 갈라놓으면서도 동시에 합쳐 놓듯이, 언어 도한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인 동시에 장애물인 것이다. "언어는 고독한 어느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오로지 인간들 사이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두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그 두 사람이 그 낱말들로 동일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11f)

그러한 노선을 쫓아 마우트너는, 가설이란 훌륭한 추측이며, 이른바 성공적인 "어둠 속의 조준"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과학의 토대는 이례적으로 훌륭한 귀납들이다. (213)

수학과 물리학이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의 수는 "경계 지어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견은 현상으로 "한계지어져 있다."(243)

<내가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의견이나 신념, 혹은 믿음을 강요하여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그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한 가지 의미에서 이것은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다음의 일, 즉 의견, 신념, 믿음의 수용에 선행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그것은 최종적인 일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그가 그 다음 단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따라서 논쟁자는 사람이 반드시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런 경우의 본성상) 그것이 윤리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262)

이성 너머에 존재하면서, 다시금 인생과 사유를 통합시키는 좀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획득하는 작업, 이것이야말로 "주체적인" 사상가가 해야 하는 작업이다. 사실적 기술의 어휘들을 가지고는 주관적 진리, 다시 말해 삶 그 자체로서의 진리인 도덕적 진리를 전달할 수는 없다. 가치들을 소유하고 가르치게 될 주체적인 사상가라면, 소크라테스의 지적 태도를 몸에 배게 해야 한다. 반어, 풍자, 희극, 그리고 논쟁은 "간접적인 의사소통"의 도구들이며, 그렇기에 그러한 목적에 적합한 수단들이다. (294)

<나는 하이데거의 존재Sein와 불안Angst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고자 anzurennen하는 충동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쨌거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경이로운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경이로움은 질문의 형태로 표현될 수도 없고, 그에 대한 답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선험적으로 단지 무의미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의 한계에 부딪힙니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이러한 부딪힘을 알았으며, 그는 완전히 유사한 방식으로 이렇게 언급하였습니다. 즉 역설에의 부딪힘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 바로 윤리학입니다. 나는 윤리학이 과학인지 아닌지, 가치가 존재하는지 아닌지, 선이 정의될 수 있는지 아닌지 등등 윤리학에 관한 실없는 모든 얘기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윤리학 안에서 그 자체의 본성상  설명되지 않는, 그리고 결코 설명될 수도 없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언제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누군가가 선의 정의를 통해 무언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해 말고 는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320f)

<왜 많은 사람들은 글을 쓰는가? 글을 쓰지 않을 만한 인품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332)

<언어의 한계와의 충돌이라고? 언어는 감옥이 아니다.>(333)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초월적인" 문제에 대한 최후의 해결책은, "삶의 형식"이 "언어 게임"을 위한 합당한 맥락들을 창조하는 그 모든 다종다양한 방법들과, 그럼으로써 그 언어 게임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의 범위와 경계를 어떻게 정하게 되는지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 된다. (370)

실제로, 이러한 맥락에서, 사실과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철학적 토론을, 칸트에서 시작하여 쇼펜하웅어와 키에르케고르를 거쳐 톨스토이와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는 정치 사상사 속의 한 사건으로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18세기 후반의 임마누엘 칸트는 역사에 대해 진지한 도덕적 기대를 거의 갖지 않았다. 그러나 강박적이라 할 정도록 온건한 그 자신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원칙적으로 그런 희망을 배제하지 않으려고 주의했으며, 잠깐 동안은 프랑스 혁명을 합리적 도덕성의 승리로 찬양하고자 한 적도 있었다. 그 사건을, 가치라는 본체계가 정치적 사실이라는 현상의 영역 속으로 뚫고 들어간 종말론적인 돌파구로 보았던 것이다. 쇼펜하우어를 거쳐 비트겐슈타인으로 옮겨 가면서, 우리는 희망 없는 온건주의라는 그 정치적 태도가 염세주의를 거쳐 철저한 절망으로 변모하는 것을 본다. 집단적인 도덕성은 환영illusion이다.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찾고 구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오로지 이 세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함으로써만 가능할 뿐이다. (400f)

즉 교리dogma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교리를 가지고 낡은 교리에 맞서 싸우는 유형의  해방(421)

그렇지만, "역사를 철폐"하려고 제마우리 애쓴다 하더라도, 역사가 저절로 철폐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439f)

타인을 기만하려는 의도는 결국 자기 기만을 양산하고 만다.(443)

만일 후대 역사가들이 20세기를 평가하면서 정치, 에술, 사상 등의 분야에서 전개된 우리의 모든 비판과 번민과, 그리고 혁명이 단지 무능한 왕King Log을 폭군King Stork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판단하게 된다면, 그것은 비극일 것이다.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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