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칼 마르크스(1818-1883)
- 생활정보
- 2007. 7. 30. 21:07
칼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모젤 강변의 트리어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김나지움을 다녔으며, 1835년 본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으나 곧 베를린으로 옮겨가 철학과 역사에 몰두했다. 1841년 예나대학에서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에 대하여"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첫 직장으로 쾰른에서 자유주의적인 <라인신문>의 편집자 자리를 맡았을 때 그는 화급한 사회적 문제와 부조리한 법에 대해 다루는 기고문을 쓴 까닭에 검열당국과 마찰을 빚어 점점 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1843년 언론활동을 포기하고, 가족 중 한 명의 친구의 딸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하여 파리로 이주했다. 거기서 마르크스는 공장주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2)를 알게 되어, 일생에 걸쳐 그와 함께 긴밀한 공동작업을 해나갔다. 1845년에는 프랑스에서 강제 추방당해 브뤼셀로 갔고 여기서 공산당 연맹의 회원이 되었다. 혁명의 해인 1848년에는 다시 쾰른으로 옮겨와 여기서 잠시 동안 <신라인신문>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이 해에 그는 엥겔스와 함께 유명한 정치적 강령 <<공산당 선언>>을 작성한다. 1849년에 또다시 추방당해서 무국적자로서 런던으로 망명을 했고, 여기서 지칠 줄 모르고 수많은 기사와 칼럼을 통해 언론활동과 동시에 학문활동을 했으며(그의 정치경제학적 주저인 <<자본>>은 1867년에 그 1권이 출간되었다.), 또한 국제 노동자 연맹을 통해 정치적인 활동을 하다가 1883년 1월 11일에 눈을 감는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여러 사람 가운데 무정부주의자인 미하일 바쿠닌과의 정치적 방향 논쟁을 종결짓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결정적인 자극을 받았던 가장 중요한 정신사적 원천은 독일 철학(프리드리히 헤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과 영국의 국민경제학(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르도),그리고 프랑스의 초기사회주의(삐에르 조셉, 프루동, 프랑수와 바뵈프 등)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 및 사회이론에서의 주된 사상은 역사와 사회의 발전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추동력이 있다는 가정에 들어있다. 이 힘은 물질적 생산양식, 다시 말해, 생산력(생산수단)과 생산관계(사유재산의 형태) 간의 상호관계이다. 이러한 역사해석("역사적 유물론")에, 역사발전은 상이한 단계들로 진행되며 더 높은 단계는 특정한 최종목적에 따라 표현된다고 보는 이해가 결부된다. 지금까지의 단계("사회형성")는 원시사회에서 노예제사회(고대), 봉건사회(중세)를 거쳐 자본주의적 경제조직을 갖춘 시민사회로 진행되어 왔다. 이 가운데 마지막 단계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영원히 폐기시켜버리는 혁명을 통해 붕괴될 것이다. 이 사회 속에서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의 고통과 억압, 소외의 근원악을 보았던 것이다.
이들의 사회이론에서 더욱 중요한 사상은 사회계급에 대한 이론이다. 계급은 인류사의 흐름에 있어서 사유재산, 노동분업, 그리고 낯선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발생했다. 원시사회를 제외하면 이때까지 어떤 사회가 형성될 때라도 억압된 계층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회계층(신분) 혹은 계급이 없었던 적은 없다. 마르크스는 당시의 자본주의적인 시민사회에서 지배계급은 부르주아지라 생각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반대편에 일차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이 생성된 임금노동자 계급, 즉 자신들의 노동력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있었다.
마르크스에게 미래의 전개는 법칙에 따라 예측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자본과 권력이 부르주아지에 속하는 극소수에게 점점 집중됨에 따라 점점 더 늘어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비참함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노동력이 넘쳐남에 따라 노동임금은 계속해서 압박당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결국 언급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곤궁해질 것이다. 부르주아지 지배는 붕괴되고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는 폐기되며 이행기(프롤레타리아 독재기) 뒤에는 계급없는 공산주의 사회가 생성될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계급투쟁도, 빈곤도, 착취와 억압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인류는 서로 연대하며 함께 살아갈 것이다. 이는 물론 궁극적으로 세계적 기준에서 보았을 때의 경우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정치경제학적 주저인 <<자본>>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실패에 대한 몇 가지 분명한 원인을 제시한다. 당시 산업국가들이 파산하게 될 거라는 그의 예측은 그러나 실현되지 않았다. 아마도 또한 그런 까닭에 그는 이러한 붕괴를 예견했고, 이른바 학적으로 정초된 예언에 근거하여 자본가들과 임금노동자들 간의 협정을 마땅치 않게 여겼던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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