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

이 사상가는 보헤미안 산업부호 가정 출신이며 빈에서 태어났다. 1889년 태어나 1951년에 사망했다. 대부르주아지의 가정환경 속에서 그는 수많은 예술가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베를린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고, 나중에는 캠브리지에서 공부했다. 이곳에서 그는 버틀란드 러셀의 제자였고, 후에는 동료가 되었다. 그는 (G. E. Moore를 통해) 분석철학의 사유모델에 입문하게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다가 포로로 이탈리아에 수감된다. 이 와중에 그는 <<논리-철학 논고>>를 집필했으며, 이 책은 1922년에 출간되었다. 전후에는 오랜 기간 동안 초등학교 선생으로 일했으며, 이때 <<초등학생을 위한 사전>>을 만들었다.(1926) 빈에서 잠시 동안 "빈서클"의 신실증주의자들과의 대화에 임했다. 1929년에 다시 캠브리지로 돌아가 거기서 철학을 가르쳤다.

(논고의) 첫 번째 사유단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학문에 대한 신실증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개념을 따랐다. 그는 학문 언어에 있어서의 명증성과 정확성을 논리적 경험주의의 토대 위에서 구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확하게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문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종래의 철학의 수많은 문제들은 언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어는 우리 이성의 한계이다. 우리는 스스로 사실들에 대한 그림을 구성하지마, 모든 그림은 현실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다. 하나의 사실은 사태에 대한 존재이다. 우리의 세계는 경우들의 집합이다. 학문에 있어서 우리는 요소명제와 복합명제를 구별한다.

명제들의 진리는 항상 하나의 의미기준에 결합되어 있다. 경험적 기준은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 명제들만이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모든 다른 명제들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 명제들은 학문 체계 안에서 아무런 자리를 갖지 못한다. 하나의 명제의 의미는 참 혹은 거짓을 통해 규정된다. 명제가 참되다면, 그것은 사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논리는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미지이지만, 그것의 명제들은 항상 동어반복이다.

이 때문에 논리는 실재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논리는 "초월적"(6.13)이다. 논리의 외부에서 모든 것은 붕괴되다. 그러나 세계의 의미는 논리의 외부에 놓여 있다. 세계 안에는 아무런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치란 모든 사건과 본질의 외부에 놓여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윤리는 "초월적"인 것이며, 정확하게 언명될 수 없다. 한 인간의 죽음에 있어서 세계는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끝난다. 그러므로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며, 체험되지 않는 것이다.

무시간성이 영원성으로 이해된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이는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무한하게 되며 우리의 시야는 한계가 없을 것이다. 영원한 삶은 현재의 삶과 꼭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이다. 시간과 공간 속의 삶의 수수께끼의 해답은 시간과 공간의 외부에 있다.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 더 높은 존재는 완전히 무관심하다. 신은 이 세계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신비다. 영원한 것에 대한 관점으로 세계를 직관하는 것. 세계는 무언가 제한된 것으로, 인간이 뭐라 말할 수 없는 물음으로 느껴진다. 우리가 모든 학문적 질문에 대해 대답한다고 해도 우리의 삶에 대한 물음은 건드려지지 않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어떠한 질문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소멸됨으로써 해결된다.

삶의 문맥 속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이것은 신비스러운 것으로 드러난다.(6.522) 과학적 철학은 자신의 규칙에 따라 명확하게 말해질 수 있는 것만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명제들을 만들어낸 사람은 그의 명제들의 확실한 기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 명제들은 경험적 의미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방식으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학문에 있어서 침묵해야 한다.(7)

후기의 철학에서 그는 자신의 경험적 의미기준을 바꾼다. 그것을 실용주의 철학의 통찰과 관련지은 것이다. 이제 그는 새로운 의미기준을 전개시키며, "실용주의적 전환"을 수행한다. 우리는 한 개념의 의미를 언어 속에서의 그것의 사용을 통해서 인식한다. 우리의 언어는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게임이다. 삶 속에서 우리는 단지 하나의 게임이 아니라 수많은 "언어게임"을 한다. 이 게임들 각각에서 개념의 의미는 다르게 확정된다.

우리의 "언어게임"은 항상 우리의 삶의 형식과 결합되어 있다. 그 형식들 속에서 우리는 삶과 세계에 대한 특정한 입장을 표현한다. 말한다는 것은 하나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행위를 한다(<<철학적 탐구>>23절.) 그래서 철학은 언제나 언어를 매개로 하여 우리의 이성을 현혹하는 것에 대한 싸움이다. 철학의 목적은 파리에게 유리병의 출구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개념의 의미는 언어 속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데서 생겨난다. 문법은 언어 속에서 단어들의 사용을 기술하며, 이는 게임과 비슷하다. 우리는 항상 다양한 "언어게임"을 한다. 학문적인, 미학적인, 도덕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게임들 등등. 이것들을 위해서 다양한 의미기준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로써 종교적 언어 게임도 다시금 의미와 의의를 얻게 되고, 그것의 내용은 특정한 삶의 형식에 의해 각인된다.

실용주의적 철학과 이렇게 관련맺음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편협한 실증주의적 의미기준에서 떠났다. 언어는 언제나 우리 삶의 형식과 우리의 태도의 한 부분이다. 언어게임은 생성 소멸하며, 삶을 통해 산출된다. 종교적인 언어 게임에 대해서는 하나의 도덕적 의미기준이 있는데, 종교적 언어 게임은 도덕적 가치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종교적 언어의 발화자가 도덕적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는지 아닌지가 검증가능해진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윤리도 종교도 다만 체험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언어 없는 종교만이 존재하는 것이며, 이 종교에서 언어란 비본질적인 것이다. 이와 함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분석과 분석철학의 선구적 사상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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