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니콜라우스 쿠자누스(1401-1464)

후기 중세와 인문주의 시대의 이 사상가는 1401년부터 1464년까지 살았다. 모젤 강변의 쿠자누스 출생으로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을, 파두아에서 교회법과 나중에는 수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고대의 저작들(타키투스, 플라우투스)을 두고 오랫 동안 씨름했으며, 인문주의 철학의 신봉자가 되었다. 라이문두스 룰루스의 신비주의적인 글을 통해 이슬람 문화에 대한 관심을 싹틔웠다. 그는 성직자였고, 후에는 브릭센의 주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교황의 사절로 일했다.

바젤 공의회에서는 개혁가에 속했고, 페라라 공의회에서는 비잔틴 교회측의 대표들과 교섭했다. <<Reformatio generalis>>라는 책에서 그는 로마의 성직자 개혁을 조직했다. <<De concordia catholca>>에서는 전체 세계에 통용되는 보편적 기독교 질서의 모범상을 구상했다. 그들(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이 서로를 알게 된다면 종교적 평화가 가능하다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그는 Cribatio Alkoran이라는 책에서 이슬람인들에게 기독교를 이해시키기를 바랐다.

그는 모든 민족과 종교가 유일신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세계평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역사를 통해 민족들을 이끄는 것은 신적인 로고스이다. 우리 안에는 무한과 영원을 향한 깊은 충동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신을 인식하고 사유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곧 우리 사유의 한계에 부딪친다. 신은 무한하고 절대적이며, 피조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만이 신에 가까이 갈 수 있지만, 그들도 신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유명론자들에게서 자극을 받아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우리가 존재의 최종 사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실히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 배후에 생각할 수 없는 무엇이 존재하는 우리 사유의 한계에 맞닥뜨린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무지의 지"에 들어선다. 우리는 분석적 오성을 가지고서 현실의 여러 부분 영역들을 탐구하며, 범주와 개념을 만든다.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가 신의 비밀에 이를 수는 없다.

신 안에는 모든 부분들과 대립이 하나의 근원적인 통일체로 묶여 있다. 이러한 통일을 우리가 이성을 가지고 알아낼 수는 없다. 신비적인 관조와 무아의 경지 속에서만 그것을 예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신 안에서는 모든 대립이 해소된다. 신은 빛과 어둠, 선과 악, 존재와 무, 가능한 것과 현실적인 것을 포괄한다. 이 넓은 신성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세계의 근원적 통일을 느낀다.

신 안에서 모든 존재와 사물의 통일이 우리에게 드러난다. 전 세계가 함께, 그러나 무한히 커지는 것, 이는 신이 되는 것일 수 있다. 그 속에서 세계가 전개되며 창조의 과정이 이어진다. 그러나 또한 그 반대도 타당하다. 세계 속에서 신성이 전개되는데, 신은 생성 중에 있기 때문이다. 신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르쳤던 바의 순수한 현실태가 아니다. 그 안에서 가능성과 현실성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가능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통합한다. 그는 전자도 후자도 아니고, 항상 그 둘의 함께 있음이다. 모든 현실성에 앞서 항상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생성과 발전의 가능성은 신 안에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역동적인 신의 형상과 함께 쿠자누스는 스콜라철학의 정적인 사유와 결별한다. 신은 자신 안에서 정신과 물질, 가능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정지와 운동을 통일시킨다.

이러한 단초와 함께 신성의 발전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신 안에 선과 악이  통합되어 있다면 악에서 선으로의, 어둠에서 빛으로의 발전 또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무한한 공간과 무제한적 시간을 바라보아야 한다. 세계와 우주는 신성이 전개되는 장소이며, 신의 무한성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된 세계에 있어 "신은 무 안에서" 나타난다.

무한한 신성과 유한한 세계의 결합지점은 예수이며, 예수는 세계이성이 육화된 존재이다. 인간 예수 안에서 세계이성이 육신을 취했으며, 신적인 것이 세계 속으로 들어왔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우주이며, 우주의 모사물이다. 이 안에서 모든 것은 가장 높은 것으로부터 가장 낮은 것에 이르는 단계질서에 따라 배열된다. 무한히 큰 것과 무한히 작은 것의 문제는 수학의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지구는 우주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중심점이 아니다. 우주 안에 고정된 점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우리의 모든 측정은 상대적이다. 우리는 어떤 하나의 고정된 점에서 운동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은 자연과 우주의 도처에 있고 어디에도 없다. 그 때문에 우리는 놀라게 되며, 모든 것은 신적인 것에 참여하고 있기에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학자는 무엇보다도 자연 속에서 사소한 사물들과 움직임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삶을 기뻐할 수 있다. 신적인 것이 우리의 세계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성을 다만 상징 속에서만 파악하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종교란 있을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 또한 상대적이다. 모든 종교의 형상 뒤에는 단 하나의 신, 우리 인간의 이성과 언어로는 파악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신이 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단 하나의 종교만이 존재하는데, 그 안에서 제의 양식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이슬람교와 유대교는 기독교와는 다른 제의를 가지고 있다.

이로부터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을 가지고 만나고 대화하려는 시도는 의미있는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다른 종교를 가진 이를 박해하는 일에서는 아무런 이성적인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모든 종교는 유일신의 비밀을 숭배하는 데 나름의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방인에 대한 관용과 인간성에 대한 옹호를 볼 수 있다. 신 안에 절대적 최대와 절대적 최소가 있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우리는 인간적인 것의 완벽한 척도와 우주의 완성을 본다.

이 사상가는 폐쇄된 믿음 체계의 생각들을 부수었으며, 이로써 새로운 사유의 시대의 시작점에 서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사유의 단초를 계승해가는 신학자는 거의 없지만, 그러나 그 단초들은 오늘날 매우 현실성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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